스페이스 디자이너 / 근대건축실내복원전문가 최지혜 교수

몽타주를 그리듯 재현하는
그 시대 그 공간
공간을 재현하며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근대건축실내재현전문가 최지혜 교수에게서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붙이는 직업의 어려움, 그리고 매력에 대해 들어봤다.
글 임지영 사진 안호성
직업세계공간을 창조하는 사람들 / 근대건축실내복원전문가 최지혜 교수 인쇄
몽타주를 그리듯 재현하는 그 시대 그 공간
공간을 재현하며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근대건축실내재현전문가 최지혜 교수에게서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로 이어붙이는 직업의 어려움, 그리고 매력에 대해 들어봤다.
글 임지영 사진 안호성

아르바이트가 이끈 '장식미술'이라는 신세계

최지혜 교수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는 주변 집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붉은 서양식 벽돌집이 있다. 이름하여 ‘딜쿠샤’, ‘기쁨의 궁전’이라는 공간을 재현한 주인공은 근대건축실내복원전문가 최지혜 교수다.

“근대건축실내복원전문가. 우리나라에 해당 직업이 없다보니 그렇게 부르시더군요. 직업치곤 다소 긴 이름이지만 어쨌든 그게 제가 하는 일의 이름이 되었어요.”

실내 복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건 우연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지금의 직업과 무관한 독일어를 전공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교육과 4학년 재학 시절 했던 번역 아르바이트가 전환점을 만든 계기가 됐다.

“유럽에서 바이올린, 첼로 같은 옛날 악기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주로 번역 일을 도맡아 했어요.”

회사의 대표는 유럽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경매 회사의 서양 앤티크 가구 카탈로그들을 한 웅큼 가져오곤 했다. 그 도록들을 미술품이나 가구가 경매로 거래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래된 물건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게다가 구닥다리 앤틱이 고가에 거래되는 것,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뚫어져라 도록을 보는 모습을 눈여겨 본 회사의 대표가 그에게 영국에 있는 미술전문 대학원 ‘소더비 인스티튜트(Sotheby’s Institute)’ 유학을 권했다. 그렇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고, 그는 1994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세계적인 경매회사인 소더비가 운영하는 미술 전문 교육기관으로 영국 유학을 떠났다.

처음 접하는 유럽의 고미술과 장식미술은 ‘신비의 세계’ 그 자체였다. 영국 유학생활에 완벽 적응할 무렵 회사가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 학비 지원이 힘들다는 연락이 왔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도 학업을 그만둘 생각이 없던 그는 유학에 반대하는 가족에게 '딱 한 학기 등록만 도와 달라'고 설득했다. 장학금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이후 지독히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보란듯이 전액 장학금을 받아 장식미술사 석사 과정을 마쳤다.

“천직이 있듯 내게 꼭 맞는 전공도 있는 것 같아요. 우연히 떠난 영국 유학에서 만난 장식미술이 그랬어요. 취업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했다는 기억은 없어요. 밤을 새서 시험 공부를 한 날 마저도 즐거운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 있어요.”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참여한석조전·딜쿠샤 복원·재현공사

끝없는 지욕(知浴)은 머지않아 열정적인 창작욕으로 이어졌다. 유학시절 본 영국의 수많은 하우스 뮤지엄(박물관으로 만들어진 집)은 그에게 적지 않은 자극이 됐다. 귀국 후 그는 2005년 장식미술사를 다룬 ‘앤틱가구 이야기’(호미)를 발간했다.

이 책을 본 박물관 큐레이터의 제안으로 덕수궁 석조전 실내 공간 복원을 맡게 됐다. 2014년에는 덕수궁 석조전 복원 사업에, 2016∼2018년에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재현 작업에 참여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재현 작업을 맡았을 때는 참고할 사료가 너무 적어 오래 전에 발간된 현지의 신문이나 저널 검색에만 수 주를 보내기도 했다.

“바깥으로 드러난 외관에 비해 실내 공간은 사적이고 은밀한 경우가 많아 드러나지 않지요. 사진이나 관련자료가 많지 않고 세간들은 어디론가 흩어져 버려 재현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어요.”

최지혜 교수, 앤틱가구 이야기
↓앤틱가구 이야기

단서가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찾고 스크랩해뒀다. 기나 긴 ‘검색열전’ 끝에 오래 전 공사관을 방문한 기자가 쓴 기사에서 ‘생동감 넘치는 초록색 커튼’이라는 구절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기도 했다. 텅 빈 공간에 조금씩 살을 붙여 입체화하는 작업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최근에는 2017년 8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딜쿠샤 복원공사에 실내 고증 연구 및 자문을 맡아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딜쿠샤는 3·1운동 독립선언서를 해외에 최초 보도한 미국 통신사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가족과 약 25년간 살았던 집이다.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테일러의 부인인 메리 테일러가 이름을 지었다.

최지혜 교수, 앤틱가구 이야기
↑딜쿠샤 거실

최 교수는 2년여에 걸쳐 옛 자료에 기초해 가설을 세우고 이론적으로 고증한 끝에 실내를 복원했다. 복원에 주어진 단서는 테일러 가족이 찍은 흑백사진 6장이 전부였다.

“보통 실내는 사적인 공간이라 자료가 많지 않은데 그래도 사진이 있어 해볼 만했어요. 진짜 도전과제는 가구 복원이었어요. 근대 가구는 박물관에 보존되기보다 버려지는 경우가 많아 구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쓴 소설 속 탐정처럼 사진 속에 등장한 물건 하나하나를 확대해 형태, 재질, 장식을 낱낱이 분석했다. 벽난로를 비롯해 실내 물품의 약 70%는 해외에서 구입했고, 붙박이 의자 등 나머지는 국내에서 최대한 비슷하게 제작했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흔적 볼 수 있는 공간 많아졌으면

프로젝트별 참고 사료 보관함, 앤틱가구 이야기
← 프로젝트별 참고 사료 보관함
↓앤틱가구 이야기

복원을 거친 실내 공간은 조금씩 흑백에서 컬러로, 평면에서 입체로 되살아났다. 그는 근대 공간의 실내를 복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성 구현’이라고 강조한다.

“테일러 부부가 찍은 흑백사진을 토대로 가구, 커튼, 카펫, 조명 등 그 시대에 사용했던 것과 가장 비슷한 물건을 하나하나 채워가는 식으로 작업했어요. 마치 작은 단서들을 가지고 범인의 몽타주를 완성해가듯 말이죠.”

딜쿠샤는 한국의 실내장식이 서구식으로 변해가는 길목에 있는 집이라는 점에서 그에게도 독특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다. 서양식 가구와 장식은 고종 때 유럽 각국에서 들어와 궁궐에서 먼저 유행했고 그 이후 고관대작과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집으로 퍼졌다. 근대 초기 한국의 생활방식과 양식 생활방식의 절충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인 딜쿠샤는 여러모로 특별한 프로젝트였다.

그는 순간 순간이 품었던 기억과 감정들을 오랫동안 간직하고파 딜쿠샤 복원까지의 과정을 담은 기록을 책으로 펴냈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딜쿠샤〉(혜화1117)는 그가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며 남긴 생생한 기록이다. 공간을 복원하는 작업은 어쩌면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현재 앤티크연구소 ‘수택’을 운영하고 있다. 국민대 예술대학 겸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 프로젝트에 몇년이 소요되는 실내 재현을 하면서 틈틈히 저술 활동에 에너지를 집중하기도 한다.

얼마전에는 네 번째 프로젝트였던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복원 연구 작업을 마쳤다. 대조전과 희정당은 원래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집무실로 쓰인 곳이다.

“시간이 멈춘 공간에 다시 숨결을 불어넣고 새로운 시간이 흐르게 하는 것, 그게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복원을 통해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 그 꿈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근대건축실내재현전문가는 오늘도 가보지 못한 공간, 닿지 못한 시대를 사뿐한 발걸음으로 유람한다.

↑창덕궁 대조전
실내 재현·복원에 관심이 있나요?
최지혜 교수가 말하는 근대건축실내재현전문가의 자질

고증을 잘 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를 잘 알아야 해요. 역사 공부와 외국어 실력은 필수죠. 하나의 물건을 찾기 위해 수십 개의 다양한 키워드를 수많은 해외 사이트에서 검색해야 하는 일은 흔해요. 심지어 어렵게 배송된 물건이 사진과 달라 다시 찾아야 하는 당혹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려는 집요함을 갖춘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아요.

유명한 역사적 사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이 어떻게 먹고 입고 생활했는지도 중요한 역사라고 생각해요.
그 시대만의 독특한 생각과 가치를 엿볼 수 있거든요.
잡월드ON 독자들도 박물관에 갔을 때 숟가락, 그릇 같은 사소해 보이는 물건들을 보며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 지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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